고용현장에서 장애인 직업개발의 촉진에 관한 고찰

실제 고용의 현장에서 장애인은 일에서 그의 능력이나 기술을 성숙하고 생산적인방법으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소외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산업사회에서 일의 대부분이 너무 단편적이고 전문화되어 있으므로 장애인은 고용현장에서 개발된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장애인이 직업능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동기유발을 고취시켜서 고용현장에 유입되도록 해야 합니다. 동기부여를 결정해 주는 인지적인 요인과 노력 그리고 이들 사이의 연결관계에 초점을 두는 내재적 동기부여 중심의이론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기대이론은 개인의 동기부여 정도는 노력을 기울여서 얻게 되는 결과가 얼마나 그에게 매력적인가 하는 정도와 노력을 기울여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나 큰가하는 두 가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기대이론은 어떤 한 개인의 동기부여 정도는 최종보상에대한 개인이 느끼는 매력정도와 그것을 얻기 위해 요구되는 성과수준에 대해 개인이 느끼는 매력정도, 성과수준에 따라서 어떠한 최종 보상이 얼마나 주어질 것인가에 대한 개인의 주관적인확률그리고 개인의 노력을 기울여 필요한 성과수준을 달성할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한 개인의 주관적 확률 또는 믿음에 의해 결정이 됩니다.  둘째, 형평성이론은 공정성이론이라고도 합니다. 구체적으로 사람은 자기가 일에다 투자하는 투입과 그로부터 얻어내는 보상을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비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자신의 투입 대 보상의 비율이 타인의 비율과 똑같다면 형평에 맞는다고 생각하여 만족스러워하고 반면에 형평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게 되면 그 사람은 불쾌감과 긴장을 느끼게 되어어떤식으로든지 형평성을 회복하려는 쪽으로 노력하게 됩니다.  셋째, 과거의 성과에 대한 보상이 어떻게 주어졌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동기부여와 성과가 결정되며 또한 동시에 직무만족의 정도가 좌우하게 된다는 논리를 제시합니다. 이는 성과가 만족의 결과는 결코 아니며 그 자체로 나타나는 서로 연결되는 관계이다. 직무만족은 받은 보상에 대한 사람의 느낌을

한류 문화 돌풍의 배경과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요소

  불과 십 수 년 전 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은 한류의 선전은 가히 꿈과 같은 일이었다.문화 콘텐츠에 대해 조예가 깊거나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보통 외국으로부터 들여오는 콘텐츠들을 한국의 그것보다 우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일쑤였고, 그러한 생각들이 조성한 분위기 때문일까 해외 콘텐츠나 그것을 차용,모방한 콘텐츠들이 많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드래곤볼, 슬램덩크 등 일본산 만화가 큰 인기를 얻고 한국영화 흥행 순위에는 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상위권을 차지했습니다. 한국의 콘텐츠들이 해외 진출은 고사하고 자국 내에서 조차 찬밥 취급을 당하는 씁쓸한 분위기가 꽤나 오랜 시간 동안 한국의 문화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이 순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한류’라는 현상이 모두들에게는 더더욱 이례적으로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한류는 밀레니엄(2000년대)시대 중국,대만,일본,베트남,등 동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한국의 드라마, 영화, 음악, 패션, 게임, 음식, 헤어스타일 등 한국의 대중화와 인기 연예인들을 동경하고 추종하며 배우려는 대중문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은 이를 동아세아 여러 나라에 한국의 대중문화가 보급되는 현상으로 확산 이론적 관점에서 한류를 정의하였습니다. 또한, 한류를 가장 간단히 정의내리자면, 1990년대 말부터 동남아시아에서 일기 시작한 한국 대중문화의 열풍이라고 볼 수 있으며, 1996년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중국에 수출되고, 2년 뒤에는 가요 쪽으로 확대되면서 중국에서 한국 대중문화의 열풍이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한류는 중국에서 일고 있는 이러한 한국 대중문화의 열기를 표현하기 위해 2000년 2월 중국 언론이 붙인 용어입니다. 한류 등장 배경은? 1. 한류의 배경에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문화적 정체성으로 혼돈을 겪고 있는 상태에서 한류 열풍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문화적 종주국 행세를 해온 중국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하에서 국민의 문화적 욕구들 을 충족시키지 못함으로써 오늘날 개혁·개방 노선과 시

인간에 대한 다른 생물들과는 다른 철학적 탐구

  인간의 존재에 관한 물음은 사실 철학의 중심 주제가 됩니다. 철학은 인간인 우리들 자신에 관해 참다운 앎을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존재들 가운데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반성할 줄 아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인간을 논리적으로는 대상으로 삼고 있으나 그 실상은 나는 무엇인가라는 자아에 대한 철학적 반성인 것입니다. 이성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인간의 초월적 본질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에서 작용하고 있는 추리와 판단의 기능에 불과한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고유한 본질을 지닌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연에 같은 근원을 둔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을 뿐입니다. 인간이 인식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자연이나 세계도 인식의 주체인 인간과 대립되어 있는 객체로서 대상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인간의 삶이 체험하고 있는 관계의 세계인 것입니다. 자연에서 뻗어나온 한 생물로서 인간 존재의 구조를 살펴보면 인간은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구조적 기능을 가지고 있고 그 내면에서는 욕망과 무의식이 그것을 작동시키는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인간이라는 명사는 류를 지칭하는 보편적인 개념이나 실재하는 인간은 개체들로서 생활 방식이 다르며 선택이 다르고 각자가 지향하는 목적이 다릅니다. 구조는 같으나 인간이 지향해야 할 어떤 주어진 목적이 없습니다. 인간은 동물들과는 다르게 의미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의미는 언어에 의해 발생합니다. 언어는 자연과의 관계에서 얻어진 체험을 표현하며 의사전달을 위한 수단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인간이 지각한 내용으로써 경험을 반성하고 연상을 하거나 예측을 하면서 관념들을 결합시키는 것은 언어를 통해서입니다. 즉,. 의식은 언어에 의존해 사유합니다. 의식의 구조는 언어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언어의 형식을 통해 현실을 의미의 세계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의미의 세계에 살면서 희망과 좌절, 성공과 실패를

자연 변화와 인간의 흐름

 자연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움직임은 기계적인 반복운동이 아니라 생성 변화하면서 지속하고 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자연에서 발생된 만큼 인간 정신의 대상으로 물질적인 세계만이 자연이라는 인식은 더 이상 그 정당성을 지탱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생명체로서 인간이 정신과 육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구성되어 있지만, 정신만으로도 인간이 아니고 육체만으로도 인간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자연은 자연의 무릇 현상속에서 작용하고 있으며, 자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연은 인간의 이성이나 감성의 대상이 아니라 이성이나 감성 그 자체가 인간이라는 현상적 존재를 통해 나타난 자연의 작용임을 알야아 합니다. 나는 지금 살아서 숨쉬고 있으나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나는 생명과 호흡의 주체가 아닙니다. 내가 그 생명작용의 주체라면 내 뜻대로 심장의 박동이나 호흡을 임의로 멈출 수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연은 변화로 몸을 삼고 있는 관계의 그물입니다. 자연의 무릇 존재들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할 뿐만 아니라 어떠한 것도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란 없습니다. 관계에 따라서 이것으로도 되고 저것으로도 됩니다. 무엇하나 같은 시간에 동일한 공간을 차지할 수가 없기에 그것이 의존하는 관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같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인간의 이식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물의 공통점을 추출해 개념을 만들고 같은 종과 류로 분류하고 있으나 그러한 개념적 존재는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유 속의 개념적 인간과 어떤 상황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실재의 인간과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관계의 구조를 초월하여 있는 추상적 존재로서 인간은 마치 언어사전의 단어처럼 의미 구조에서 벗어나 있는 기호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연은 자연의 현상들과 분리될 수 없고 자연의 현상들은 관계에 의존되어 있기에 개별적으로 독립하여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의존적 관계 속에서만 그 개체성이 규정이 됩니다. 관계에 의한 생성변화

철학에서 정치, 국가의 관계에 관한 고찰

  정치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동시에 우리에게는 국가가 필요하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가 아니므로 자연히 국가와 같은 집단을 형성하도록 되어 있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내버려 두면 결코 연대하지 않는 이기적인 생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에게 국가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인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만으로 살아간다면 이보다 행복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특별한 감정을 갖지도 않은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이 이 외에도 많다는 것은 자기자신도 그 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음으로 그 밖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기술이 바로 정치입니다. 나 외의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하여 일정한 룰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더라도 자발적으로 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덧붙이자면 그 룰에는 강제력을 부여하는 권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주변 도처에 권력이 들어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고 그것도 정치입니다. 우리는 매일 다양한 권력에 순종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권력에 순종한다고해도 맹종한다는 의미와는 조금 다르며 여러 가지 대립이나 모순이 있음을 인정한 후에 따른다는 것입니다. 정치라는 것은 우리들을 대립시키면서 한데 묶어주는 기술입니다. 그래서, 삶의 기술로서의 정치가 막을 내리는 일은 없습니다. 정치의 종언이라는 것은 인간성의 종언이고, 자유의 종언이며 역사의 종언인 셈입니다. 만약!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위에서 무엇을 명령해도 거절할 수 없게 됨을 뜻합니다. 이는 국수주의자나 선동가들에게 맡기려는 태도입니다. 결과가 어찌되던 불만을 토로할 권리는 당신에게 이미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직하지 못하거나 최악의 상태가 되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변명이 될 수 없고, 몰랐다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도 있습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철학 공부의 본질 인간은 지능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이 지구 위에서 특수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체력이나 체질로 보면 결코, 생물의 세계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될 수 없는 인간이 지구 위의 패권을 잡게 된 것은 오로지 그의 지능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능은 인간을 위하여 반드시 고맙고 유기한 기능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지능이 신의 그것이 그렇다고 상상하고 있는 것처럼 완전무결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인가을 위해 오로지 고맙기만 한 은혜임에 틀림이 없었을 것이지만 사실은 인간의 지능이 매우 불완전하며 때로는 오류를 범하기 쉬운 안타까운 기능인 까닭에 차라리 없느니 만도 못한 화근으로 작용할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금단의 열매 속에 담긴 우의도 저 위험한 지능이 부를지도 모를 불행을 경고하는 뜻을 바탕으로 삼았다고 보아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능이 인간을 위해 어느 정도 고마운 것이고 또 어느 정도 위태로운 것이냐에 대해서는 사람들에 따라서 견해가 구구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지능을 가졌고 그 지능이 절대자의 그것처럼 완전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한계를 가진 기능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그것이 무엇일까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철학이라는 이름의 것이 바로 그 유한한 인간의 기능으로서의 지능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졌다고 하는 것도 누구나 의심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만약에 지능이 없었으면, 철학이라는 것이 생겼을 리가 없고 또한 그 지능이 절대자의 그것처럼 완전했더라도 철학은 없었을 것입니다.지식에 대한 사랑이 철학의 근본인 셈입니다. 지식 또는 지혜에 관한 뜨거운 사랑이 철학을 하는 정신의 근본임에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으나, 지능을 가진 존재이므로 인간은 항상 알기를 원하고 또 그 지능이 신의 그것처럼 무한하지 못하는 까닭에 지식에 대한 인간의 사랑에는 충만 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으며 거듭된 노력에 따르는 괴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철이 들기도 전의

불교의 가르침은 어디서 오는 가

 불교의 가르침은 마음에 관한 것, 즉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면서 마음이 어떻게 여러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마음으로 인하여 세계를 어떻게 왜곡해 지각하고 마음으로 인하여 어떻게 고통을 받고 있는지, 그리고 마음을 어떻게 올바르게 쓰면서 올바르게 지각하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를 다룬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앞의 세계가 마음에 의하여 인도되고 마음에 의하여 이끌려 다닌다는 것은 다음의 몇 가지 의미로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1.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마음이나 의지에 의하여 전개되어 왔고, 현재의 문명은 지금까지 현존해 온 인류의 마음의 집합적 표현입니다. 마음에 의한 지각과 마음에 의한 지향성에 의해 인류의 역사는 전개되어왔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2. 현재 내가 지각하고, 이해하고 있는 세계는 나의 마음의 투영입니다. 하늘의 색깔도, 나무의 모양도 타자에 대한 이해도, 사회현상에 대한 지각도, 나의 마음의 투영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에서 투영은 아니고 존재하고 있는 것을 지각하는 데 있어서 자기의 물리적 조건, 지적 능력, 심리적 상태 등 자신의 조건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의 투영입니다. 물론, 마음의 투영 과정에서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 가공적인 것을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투영되지 않는 사물은 지각되지 않습니다. 3. 개개인의 삶은 각자의 의지, 결심, 지향성에 달린 문제 즉 마음먹기의 문제입니다. 나는 마음먹은 대로 행위하고 살아가며 마음먹은 대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습니다. 나의 운명은 나의 마음먹이에 달려 있고, 현재의 나의 모습은 나의 마음씀이나 나의 의지의 산물입니다. 조금 더 강하게 말하면 나는 나의 마음씀이입니다. 하지만, 불교가 마음의 결심, 의지, 지향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개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환경적 요인들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개인의 의지나 지향점이 환경적 요인들의 영향을 받으나 동시에 각자가 어떤 지향성이나 의지를 갖느냐에 따라서 환경적 요인